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설잠스님(김시습)

[무량사] 매월당 김시습 (설잠스님)

by 무량사 2017. 7. 20.

서북지방으로부터 만주벌판에 이르렀다가 다시 동으로 금강산을 거쳐 저 남쪽 경주에 이르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경주 남산, 당시 이름으로는 금오산에 은거해서 지은 것이 {금오신화}(金鰲新話)이다. {금오신화}는 소설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, 속세의 명리를 좇지 않고 순수한 인간 그대로를 보여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김시습이 추구하던 인간상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겠다. 이 10년 은거 동안에 그는 당대를 꼬집는 글들과 많은 시편을 써 남겼으니 지금 남아 있는 {매월당집} 23권 중에 15권이 시로 2,200여 수에 이른다.

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.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었을 때의 일이다. 그때에 서강(西江)을 지나다가 어느 벽에 붙은 한명회(韓明澮, 1415∼1487)의 글을 보게 되었다.

이 시를 보고 그는 선뜻 붓을 들어 '부'(扶) 자를 '망'(亡)자로, '와'(臥) 자를 '오'(汚) 자로 고쳐 버렸으니 다음과 같이 되었다.

47세 되던 해(성종 12년, 1481)에는 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다시 부인을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조정에서 윤씨의 폐비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. 그리하여 유랑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.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"네 모습이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"라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했다.

율곡 이이(栗谷 李珥)는 그가 지은 [김시습전]에서 "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" 하면서도 다시 "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"고 평가하였으니 뜻을 펼 세상을 만나지 못한 지식인의 처지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듯하다.

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할 때에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3년 동안 시신을 두었다가 장사를 지내려고 열어 보니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고 한다.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서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고 한다.